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비뇽 유수 (문단 편집) === [[그레고리오 11세]] === 우르바노 5세가 선종한 후, 클레멘스 6세의 조카였던 피에르 로제 드 보포르가 '''[[그레고리오 11세]]'''로서 신임 교황에 등극했다. 그는 [[나체]]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며 자신들의 몸에 채찍질을 하고 다니는 '채찍 고행단'(Flagellant)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그들을 심판하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흐트러진 교회 질서를 재정비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등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과 [[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등의 이탈리아 남부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중단시키고 화해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백년전쟁을 끝내기 위해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정교회]]와 가톨릭의 통합을 추진했으며 [[오스만 술탄국]]을 대상으로 [[십자군]]을 일으키려 했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성직자들을 축출해 교회에 대한 민중의 신임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밀라노 공작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교황령을 탈취하려 드는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잉글랜드 출신의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를 고용한 후 나폴리 왕국과 손을 잡고 [[밀라노 공국]]을 압박했다. 1374년 6월 6일 밀라노 공작이 교황령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서약한 뒤, 그레고리오 11세는 로마로의 복귀를 추진했다. 그러나 프랑스인을 이탈리아 교회 관구의 대법관과 총독으로 임명했다가 프랑스인의 지배를 받기 싫어한 현지인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그 사이에 교황권이 강해져서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자신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한 피렌체가 1375년 7월 베르나보 비스콘티와 동맹을 맺고 공세에 나서자, 프랑스인 교황 특사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던 이탈리아 귀족들이 대거 귀순하면서 교황의 입지가 급속도로 위태로워졌다. 그레고리오 11세는 이에 대응해 1376년 3월 31일 모든 피렌체 주민을 파문하고, 각국의 유럽 군주들에게 피렌체 상인들을 그들의 땅에서 추방하면서 재산을 몰수하라고 권고했다. 추기경들은 정세가 불안해졌으니 로마로 귀환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백년전쟁과 흑사병의 여파로 황폐해진 아비뇽에 더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고, 자기 대에 교황청을 로마로 옮겨야 한다고 여기며 계획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1376년 9월 13일, 그레고리오 11세는 마르세유에서 함대에 올라탄 뒤 10월 18일 제노바로 이동했다. 이후 포르토 피노, 리보르노, 피옴비노에 들러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1376년 12월 6일 코르네토에 도착했다. 1377년 1월 13일 코르네토를 떠나 1월 14일 오스티아 항구에서 하선한 교황은 티베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산 파올로 수도원으로 향했다. 1377년 1월 17일, 그레고리오 11세는 테베레 강둑에 정박한 갤리선에서 하선한 뒤 프로방스 및 나폴리군에 둘러싸인 채 로마에 입성했다. 그러나 1377년 2월 1일 브르타뉴 중대가 리미니 근처의 체세나 시민들과 충돌해 4,000명이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로마 시민들이 제네바의 로베르트 추기경(훗날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대립교황)|클레멘스 7세]])의 선동에 따라 폭동을 일으키자, 그레고리오 11세는 1377년 5월 말 아나니로 후퇴했다.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교황파는 반격을 가해 로마냐를 굴복시키고 피렌체와 타협한 뒤 1377년 11월 17일 로마에 재입성했다. 하지만 로마의 치안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다가 1378년 3월 26일에서 27일 사이의 밤에 로마에서 선종했다. 그는 삼촌인 클레멘스 6세처럼 라셰즈듀 수도원에 안장되기를 원했지만, 로마인들은 교황의 시신을 다른 데로 옮길 수 없다며 그대로 로마에 안장하도록 했다.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한 직후, 로마에서는 [[프랑스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뽑도록 압력을 넣었고, 결국 로마 출신의 바르톨로메오 대주교가 추기경들의 투표를 통해 '''[[우르바노 6세]]'''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물러난 프랑스 [[추기경]] 13명은 4개월 뒤 아나니에서 공포 분위기속에 결정된 교황은 무효라고 선언했고, 9월 20일에는 폰디에서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인 제네바의 로베르(로베르트) 추기경을 선출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대립교황)|클레멘스 7세]]'''로 옹립했다.[* 클레멘스 7세는 애초에 이런 13명의 [[추기경]]들의 독자 교황 선출을 주도했던 추기경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리하여 서구 대이교(The Great Schism), 또는 '''[[서방교회 대분열]]'''이 발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